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백림 사건 (문단 편집) == 설명 == 당시 중정은 [[서유럽]]에 거주하는 [[한국]] 교민과 유학생 가운데 194명이 동베를린 [[북한]]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. [[독일]]에서 활동하고 있던 음악가 [[윤이상]], 그리고 [[프랑스]]에서는 화가 [[이응노]]가 간첩으로 지목되었으며 시인 [[천상병]]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[[고문]]을 당했다. 중정 요원들이 해당 인물들을 다짜고짜 한국으로 납치하여 심문했기 때문에 [[프랑스 정부]]나 [[서독]] 연방 정부와 [[나라 망신|외교적 갈등]]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. 1967년 12월 3일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34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간첩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고 단순 대북 접촉으로 판단되었다. 이후 사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까지 1970년 광복절 특사를 통해 사면했는데, [[서독]] 및 프랑스와의 외교 마찰 해소 차원에서 그랬다는 것이 중론이다. 그러나 이후 [[박정희]] 정권은 [[3선 개헌]]에 불만을 품은 [[김종필]]을 굴복시킬 목적으로 동백림 사건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던 [[청구동계|김종필계]] [[김규남(1929)|김규남]] 의원과 김규남의 대학 동문 박노수 교수를 [[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|간첩으로 조작하는]] 만행을 저질렀다. 당시 [[박정희]] 정권은 [[3선 개헌]]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국회 의석을 2/3 이상 끌어올리려 [[부정선거]]를 자행하였는데, 이에 반발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벌어지자 사회적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[[간첩]] 사건을 조작하여 사람들을 납치했다. 이 사건의 실행을 주도한 서독 대사 [[최덕신]]은 [[6.25 전쟁]] 때 [[거창 양민 학살사건]]의 책임자였지만 [[이승만]] 대통령의 비호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고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승승장구한 인물이었다. 이 사건이 국제적 외교 문제로 비화되며 [[서독]]의 단교 위협 등 국제적인 항의에 직면하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버림 받고 몇 년 후부터 반정부 성향으로 기울어지면서 [[남침유도설|한국전쟁 북침설]]을 주장하는 등 [[친북]] 활동을 벌이다가[* 최덕신은 [[광복군]] 출신으로 [[6.25 전쟁]]에도 직접 장교로 참전하였고 중장으로 전역하여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 및 서독대사까지 역임한 인물이었지만, 같이 일을 도모해 놓고 막상 곤란해지니 자신을 버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친북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.] [[월북]]했다. 그리고 50년 가까이 지난 2016년에 [[박근혜-최순실 게이트]]의 주요 사안인 [[청와대 블랙리스트]]에서 다시 언급되었다. 블랙리스트에 [[이응노]] 화백과 관련이 있는 [[이지호]](고암문화재단 대표 겸 이응노미술관장) 및 [[윤이상]]평화재단이 있었기 때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